산나리 곱게 폈다. 몇 해 전 버들령에서 옮겨온 것인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때가 되면 나 여기 있었어요 하는 듯 아름다운 제 모습을 드러낸다. 내게 버들령 산나리는 "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"이다.
외손자 동현이가 왔다. 산나리 핀 고요의 남쪽에 동현이가 왔다.
그해 봄 말달리던 나 맨땅에 굴러떨어져 늪의 시간을 허우적일때
옹알이로 내 손을 잡아주던 동현이가 왔다. 이제 걷고, 넘어지지 않고 뛸 수 있을만큼 자라서,,,
멸치 담긴 접시를 저만큼 두고 고양이를 기다린다. 주인 없는 빈 집에서 늘 배고픈 고양이, 고양이, 고양이들,,,
낯선 동현이가 두려운가 보다.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은 동현이의 참을성은 고양이의 눈치보기에 늘 지고만다.
메뚜기는 다 잡아먹어 이젠 씨가 말랐고, 먹다 버린 다시마까지 마다않고 먹어치우는 굶주린 고양이들,
낯선 동현이에 대한 본능적 경계가 그들 몸 속에 아직도 야성이 남아있음을 말해준다. 꼬리가 잘린 고양이는
그 사이 새끼를 낳았는지 몸이 많이 야위었다. 정들면 지옥이다. 짐승은 짐승으로 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
말씀을 떠올리며 오지 않는 고양이를 잊기로 한다.
동현인 어느 별에서 왔을까? 세상이 궁금한 저 눈빛, 해맑은 순진무구를 내게 보내준 분은 누구일까?
나는 그에게 무엇인가? 동현이의 옹알이가 없었다면 아침마다 만나던 사막의 날들, 그 황막함을
어쩌지 못했을 것이다.
엄마다운 엄마가 되고 싶은 딸 아이의 행복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다.
동현이와 커플 슈트가 잘 어울리는 딸 아이는 이제 효도가 무엇인지, 자식과
부모를 잇는 끈의 빛깔이 무엇인지 아는 듯하다. 세월의 힘이다.
오래 가문 텃밭에 물을 준다. 마른 땅 속 어디에 붉고 푸른 세상이 숨어 있었을까!
저 대문의 주인이 너이기를 바란다.
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흔히 말한다. 마가렛이란 말이 마가렛을 동현이 가슴 속에 꽃 피운다.
한 세계를 제 가슴에 꽃 피우는 순간들의 설레임, 싱그러움!
땅내 맡은 벼들이 진초록이다. 벼논에 뛰어들고 싶은 동현이 마음도 땅내를 맡은 듯 진초록이다.
이웃집 마굿간에가서 몇차례 소들 보고 오는 동현이 맨발이 무겁다.
소는? 하고 물으면 움무우우--하는 동현이에게 그림책 밖의 소는
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이었겠는가.
병아리 또한 마찬가지다. 기호가 아닌 실물의 살아 있는 세계 앞에서
어찌 정신 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!
마가렛은 오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. 동현이를 만날 수 있어 좋았겠다. 더없이 기쁜 표정이다.
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어서 빈집이 더 빈집같았다고 시골사시는 숙부가 말씀하셨다.
여수바우 호두나무 밭에 간다. 지난 해이든가 묘목 열 그루를 심었는데 벌레가 덤벼 몸살을 앓고 있는 놈도 있고
한 그루는 아예 말라죽기도 했다. 아무래도 살충제를 조금 쳐주어야겠다. 동현이는 어디든 나들이는 그렇게 신이난다.
어린아이들의 생기가 눈물겹기도 하다.
무슨 생각이 한 생명을 저렇게 신나게 할까?
잃어버린 시간의 흔적들 묻어있지 않는 곳 이곳엔 없다.
한 사랑이 한 사랑을 지우듯, 한 슬픔이 한 슬픔을 지우 듯, 한 그리움이 한 그리움을 지우 듯 그렇게
동현이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함께 길 간다.
실개천을 건너면 충청도 보은 땅이다.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,
내 마음 속을 큰 소리로 흐르는 실개천 소리를 동현인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?
서울과 호두나무 밭은 아득히 먼데
어린이집과 개망초는 까마득한 거리인데
동현이와 자연은 어느새 하나이다.
모성은 자연을 닮았다. 초록의 잎사귀가 바람과 햇살을 보듬고 껴안듯,,,
개망초의 키 큰 아우성을 무엇이라해야 하나?
아름다운 풍경과 기막힌 현실, 풍경과 현실 사이를 어떻게 메꾸어야 하나?
개망초 물결이 동현이에게는 영원히, 한 폭 아름다운 풍경일 수 있기를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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